九. 불야성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시들은 여름밤이 녹빛으로 눅눅하다. 선호는 거나하게 취해 성록의 오두막을 찾았다. 한평생 기와 아래 몸을 뉘어 온 주제에 허름한 너와 지붕이 도리어 기꺼운 듯 구는 이 도련님이 성록은 영 탐탁잖았다. 남선호. 부름마다 돌아보는 깨진 눈동자가 그러므로 그의 머묾을 허락한 유일한 이유이리라. 내어준 평상 끄트머리에 선호는 흐리게 걸터앉았다. 빈 술병을 연신 기울여 공허로 목을 축이려 들기에 남겨둔 싸구려 술이나마 건네었더니 망설임 없이 들이키는 꼴이 기가 찼다. 이화루의 고급술과 같을 거라 기대 마라. 해가 뜨면 분명 후회할 거다. 퍽 다정한 경고에는 픽 웃어버리며, 그딴 건 어차피 매일 해. "내일이면 너를 내치라는 상소가 빗발칠 거다." 금번에 방원이 강무장에서부터 끌고 온 그 사냥감이 화근이었다. 휘,..
八. 이율배반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두 시진이 넘도록 화평전 앞을 버티고 섰었다는 정안군 방원의 소문은 육품 감찰이 벌인 기행으로 쉬이 덮였다. 남전의 얼자가 정안군의 말을 베었다지. 쓰러져 펄떡이는 숨소리에 신경증을 호소하는 궐지기가 여럿이었다. 잘린 목이 토해낸 것은 며칠이 지나도록 눌어붙어 검었다. 앞코가 발그레한 분홍 운혜는 아침나절 그 자욱을 넘어 나섰다. 쿰쿰한 피비린내는 여름에 씻기었으나 밑창에 들러붙은 죽음은 섬의 걸음을 야금야금 늦추었다. 느지막이 저자에 닿았으므로 이제 오시午時다. "무도한 자들이 이리 많으니 감찰 나리께서는 졸도할 노릇이겠소." 해가 중천이건만 저잣거리 활기도 섬에게는 무미했다. 간단히 연이를 얼러 들어낸 속사정이 하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태 분해 식식대는 아이며 저만치 누각 앞에 붙박인 그 오라비며..
七. 지고선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여름이 저물어 해가 짧다. 마두산 골짜기에도 가을밤이 내렸다. 푸르던 잎이 앙상하니 시월의 바람이 차다. 헐거운 창틈으로 웃풍이 세다. 바깥을 내다본 휘의 얼굴이 굳었다. 반갑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치속촌治粟村에 더 머무는 줄 알았더니 빨리 왔다." 낡아빠진 나무문을 소리 내 닫는 것으로 선호는 고까운 대꾸를 대신한다. 지붕 위 설덮인 이엉이 따라 울었다. 밤어둠을 못 버티고 꺼져버린 호롱불은 무심히 구석으로 밀어버린다. "아예 여묘살이도 내 몫이라고 해보지 그래." "그러면 네 아비는 옳다구나 할걸. 장군에게 어지간히도 간살을 떨어대잖냐." 눈에 남은 잔빛에 휘가 비쳤다. 뭇 산짐승에 비견할 만한 덩치가 곁에 주저앉는다. 오래된 평상이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여묘살이야 맥쩍은 농이라지만 당초의 예상보..
六. 이상기억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남선호가 살아 돌아왔다. 개경을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을 훌쩍 넘긴 후였다. 아수라의 지옥에서 생환한 그에게 조정 대신 모두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는데, 정작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장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했다. "그리 유별난 사내는 내 태어나 처음 봤소. 선발대의 죄목이며 군탈을 모의한 증좌를 목은의 발치에 냅다 집어 던졌다지 않아." 세 살 아래 누이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려 방연이 웃는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두 뺨은 핼쓱하고 갑옷은 온통 피칠갑이었다고, 꼭 본 듯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꼴이 잔망스러웠다. 단 한 번의 소동으로 이름을 알린 그 얼자의 소문을 방연도 잘 알았다. 평시라면 누이답지 않은 과한 관심의 까닭을 의심해 보았겠으나, 명철함을 흐리고 기운을 삭인 달포째의 와병에 그는 조..
五. 휘파람새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남선호에게, 생이란 턱끝까지 차오른 물너울이었다. 잠겨 죽지 않으려면 두 발에 힘을 꽉 주고 버텨야 하는 파랑波浪. 거대한 물보라가 친다. 부옇게 부서진다. 휘를 지키려 대신 맞은 칼날이 선호의 바다를 휘젓는다. 부딪힌 파도가 핏방울이 되어 튀어 오른다.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숨쉬기가 버겁다. 아, 서럽게도 붉은 익사다. 선호야, 선호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벗의 울음을 본다. 얄궂은 일이다. 제발 이곳에만은 있지 말아라, 그렇게도 빌었건만. 그것만이 내 유일한 원이었는데. 휘야, 살아있는 것이 너무 벅차다. 세상이 가빠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다. 졸음인지 죽음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다. 이제는 쉬어야겠다. 아득하다. 북녘 먼 곳에서 숨 놓친 사내를 모르고 학..
四. 낯익은 나락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푸르러 청수靑水라는 강으로 향하시며 아버님은 아무 말 않으시었다. 더는 거역할 수 없는 왕명에 한숨을 한 번 쉬셨을 뿐이었다. 무사를 기원하며 찰갑 비늘에 볼을 부비던 어린 작별과는 사뭇 달랐다. 자존심을 앞세우느라 받지 못한 사내의 술잔이 아버지의 그림자에 걸려 있었다. 찢긴 팔과 꿰뚫은 심장으로 얻은 부관의 자리가 선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부은 뺨과 붙든 손목으로 세운 어떤 다짐도 본래 그의 것인 양 더없이 낮은 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 감히 시선을 맞아오지 않아 섬도 높은 이의 얼굴을 했다. 초조한 입술이 물색없이 굴까 꼭 물어 닫고 안녕을 삼켰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셌다. 후회는 각오보다 썼다. 까무룩 밤이 내렸다. 부친께서 아니 계신 사랑 한가운데 섬은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북..
三. 가장 높은 인연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6
기어이 꿈을 꾸었다. 젖어 눈 뜬 새벽이 시렸다. 땀이 밴 적삼에서 강비린내가 났다. 어깨를 끌어안았다. 밤이 벤 자리가 욱신거렸다. 낡은 흉과 새로 돋은 상처 중 무엇을 앞서 아파해야 하는지 선호는 알지 못했다. 깨어 앉은 하루가 한 뼘만치 어둡다. 강물이 삼킨 반쪽 혈육은 내게 살려달라 했던가 살아가라 했던가. 꿈마다 다른 울음으로 형은 죽어갔다. 매번 똑같은 음울로 선호는 내던져졌다. 어느 쪽의 우짖음도 이루어주지 못해 꿈은 여지껏 끝이 없다. 차라리 흉몽 꾸시오, 애달픈 꿈일랑은 말고. 그리 빌어준 이의 흰 낯이 눈가에 남아 아렸다. 종내 힘없는 바람이었다며 그대는 웃고 말는지. 정답게도 부르던 그대 오라비처럼 내게도 형이 있었다 하면 혹 슬퍼해 줄는지. 선호가 흘린 피에 조금의 탓도 없는 여인은..
二. 알맞은 응달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4
"너답지 않다, 오늘." 간밤의 달무리가 일러준 대로 새벽녘 비 내린 흙길이 추적댄다. 연줄이 얽혀버린 얼레를 풀며 휘는 너스레를 떨었다. 너 뭔 고민 있지? 설마 그 나리꽃 연 말고 이 오적어 연이 탐나는 거냐? 이 형님이 바꿔주랴? 연달아 묻고도 금세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구불구불한 머리칼 아래 귓구멍 한쪽은 활짝 열어 선호를 기다리고 있다. 벗의 시선은 다만 아직 멀다. 야, 선호야. 부르려는 찰나 저만치 꽃분홍빛으로 핀 희재가 아름다워 휘의 목소리는 또 한 뼘 멀어진다. 늘어뜨린 머리칼이 바람결에 돌아본다. 홀린 듯 선호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애시당초 듣지도 못했을 성싶었다. 옷이 날개요 분이 사기라며 더불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두 쌍의 시선은 한곳에 꽂혀 꿈쩍을 않았다. 두 사내가 저에게..
一. 고요의 소요
/category/정음록 停陰錄/연서
2026.07.14
정초의 달이 가냘파 검은 밤이다. 개경 숭인문 인근 이성계 장군의 사저가 저녁 내 북적인다. 담장 너머에서 연이어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오늘 밤 잔치의 규모를 가늠케 했다. 남선호와 그 아비 남전 또한 대문간을 넘어든 인파 중 하나였다. 장군의 지척에 자리한 아비와 달리 사랑마루 끝자락에 걸터앉은 선호는 대낮의 강무장을 곱씹고 있다. 답지 않게 빗맞힌 화살에 온종일 속이 어지러웠다. 푸름한 방령깃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린다. 다른 몰이꾼들과 함께 흙바닥에 퍼질러 앉은 벗의 등이 멀었다. 어디 그뿐이랴. 실패로 뒤엉킨 땀과 흙을 씻어내던 때 아비는 불쑥 통고했었다. 장군의 금지옥엽이 지금 개경에 머물고 있다. 금번에는 제대로 쏘아 맞히어 보아라. 그 저열한 속뜻에 선호는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한평생 얼자..
Miserere mei, Deus
/category/정음록 停陰錄/총서
2025.06.13
1930년대 경성부를 배경으로 하는 히애해진 + 선호섬 크로스오버히애와 섬, 해진과 선호가 각각 자매와 형제로 만난 어느 세계선의 이야기 Miserere mei, Deus 신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당에 의탁해 지내면서도 기도 한 번 하지 않는 선호를 신자들은 종종 의아해했다. 두 팔을 뻗어 온화히 웃어 보이는 대리석상이 선호는 언제고 불편했던 탓이다. 돌로 만든 그 여자는 지나치게 숭고하여 불순한 자신을 자각하게 했다. 믿음이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까. 씻은 듯 병을 낫게 할 수도 있느냐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내 또한 그 망령된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다. 해진은 여전히 아팠고 선호는 줄곧 분했다. 신을 믿고 싶지 않았다. 신을 믿는 자들은 그런데도 쉴 자리를 내어주었다. 기도는 방..